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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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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봉수제도는 사실 감각의 실험적인 직관에 의하여 쉽게 발명되었으리라 여길 수 있으나 실제로 봉수는 전부터 통일되지 않은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헌에 나타난 봉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수록 된 온조왕에 관한 봉수관련 기록이나 수로왕의 설화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특히 수로왕의 설화에서는 국가 통신기능의 원류를 엿볼 수가 있다. 수로왕이 유천간을 시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서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보케 하라고 한 봉화의 기록과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 10년을 필두로 하여 봉현·봉산·봉화성 등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봉수제의 실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때는 중국의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도 실시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시기의 사회발전 단계 면에서 미루어 볼 때는 아주 제한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봉)로, 낮에는 연기(수)로써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 시스템으로써 군사의 이동 사항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치·군사 정보를 통치자인 임금에게 전해주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전국의 봉수망은 5대 기간선로로 구성되었는데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제2로는 경상도 동래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제3로는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서울에, 제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해안을 거쳐 서울에, 제5로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것이다.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제2로, 제5로는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여 이에 대비한 것 이었다.

봉수의 전달 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 내지를 거쳐 서울 남산의 경봉수에 이르는 중앙 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변방으로 내보내는 분산식으로도 운영되었다.

봉수대는 신호를 보내기 적합하도록 시야가 탁 트이는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대개 봉수대 사이에 10km 정도 거리를 두었다. 수원 화성에는 봉돈이라는 봉수대가 성곽에 설치되어 있는데 굴뚝(화두)간의 간격을 3~4m정도로 하여 10km밖에서도 5가지 신호를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봉수대는 전국에 걸쳐 여러 개가 있었는데, 특히 남산은 각 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전달하는 국방상 중대한 임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른 곳과 달리 다섯 개나 있었는데 조선시대 서울지역에는 남산, 무악산의 동쪽과 서쪽, 아차산, 개화산 등 모두 5곳의 봉수대가 있었다.